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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일요일 오후 4:37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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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세기 22:1~13) ...
       
 
  
 

준비된 자


312
2023년 12월 3일 일요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0~21)


하나님의 나라에는 항상 일꾼이 필요하지만, 마지막 추수 때가 다가올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인간 경작이 끝날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꾼을 찾으신다고 해도 자원하는 사람마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 있는 준비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준비된 자로서 쓰임 받으려면 준비된 그릇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준비된 자는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데 과연 주인은 어떤 그릇을 골라서 쓸까요?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합니다. 국그릇에 담아야 할 것을 접시에 담으면 먹기가 불편하지요. 용도에 맞는 그릇 중에서도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더 좋습니다. 여러 개의 그릇이 있어도 쓰기에 편하고 취향에 맞으면 그 그릇을 늘 쓰게 되지요. 또한 깨끗한 그릇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용도에 맞아야 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하지요.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라는데 자기 뜻대로 서로 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고 해도 더러운 그릇이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엡 6:12 ; 고전 4:20).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돼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만일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영적 변화가 더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영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1) 구체적이고 지속해서 노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결을 이루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해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결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라는 막연한 기도만으로는 변화가 늦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죄와 악한 마음이 있는지를 찾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지요.
또한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죄악된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하지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두 달 지날수록 자기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은 잘하는데 발견한 것에서 그치고 맙니다.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하는 은혜 가운데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의 일들을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깨우침이 올 때나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 충만하지요.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들판에서 잡초를 뽑는다고 해도 뿌리를 남기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이처럼 죄성도 발견해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요.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며, 다 뽑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히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나머지는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해 스스로 속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기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스스로 말씀대로 살려 하고, 충성하려 하고, 성결되고자 하기에 자신은 악이 없고 말씀대로 사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중 세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는 경우
한 일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일하다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습니다. 내 고집과 주장이 있기 때문에 상대가 부딪힐 원인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때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했으니까.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하며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녕 화평을 깨지 않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 본다고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질서상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합니다. 비진리나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지요.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이 너무나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도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하지요. 이것은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 뿐 아니라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해지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변명하지요.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 하고 스스로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상대의 잘못만 생각하고 자기 잘못은 덮는 경우
예를 들어 김 집사가 어떤 잘못을 했는데, 이 집사가 그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서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가 냉랭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서로 상대의 잘못만 생각합니다. 김 집사는 이 집사가 자신의 허물을 말했으니까 화평이 깨어진 것이라 하고, 이 집사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김 집사가 속이 좁아서 화평이 깨어졌다고 생각하지요.
정녕 성결을 사모한다면 상대의 잘못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범사에 근신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요(딤전 5:22). 백 가지 중의 아흔아홉 가지는 상대의 잘못이고 하나만 자기 잘못이라고 해도 그 하나를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비진리가 발견되어도 이것을 부인하는 경우
어떤 사람이 무례한 행동을 해서 이에 대하여 그를 깨우쳐 줘야 할 때도 사랑과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말로 표현했어도 속으로 감정이 있었다면 그것을 회개하고 뽑아버려야 하지요.
전혀 감정이 없는 평안한 상태에서만이 상대를 바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감정이 있다면 상대를 바로 이해할 수 없고 내 감정에 치우쳐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에 정죄가 나오지요.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정이 있어서 말했으면서도 '사랑으로 말했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었다.'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양심에 찔림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감정 품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끝까지 부인하지요. 이는 어느 정도 영적으로 이루었다는 영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겸비한 마음으로 성결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감정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온유함으로 권면했는가?', '상대의 입장을 살피지 못하고 말함으로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다시 한번 돌아볼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을 다른 사람이 얻었을 때 순간이지만 낙심되었다면 내 안에 시기 질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잠깐 떠올랐다 해도 내 안에 그 죄의 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더욱 집중적으로 기도해서 죄의 뿌리까지도 뽑아내야 하지요.
어떤 사람은 그 마음을 얼른 돌이켜 버리므로 자기가 낙심한 것까지 부인합니다. '나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려고 노력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라고 생각하지요. 물론 자기 안에 어떤 비진리가 드러났을 때 즉시 돌이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낙심될 때 계속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기뻐하는 마음으로 바꿔야 하지요.
그런데 그 순간에는 돌이켰다고 해도 마음 근본을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모습이 또 나옵니다. 비슷한 상황이 될 때마다 낙심하고, 그때마다 돌이키기만 하니 근본이 변화되지 않으므로 성결을 더디게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더구나 이 마지막 때는 더욱더 많은 영의 사람이 필요하지요. 따라서 철저히 겸비한 자세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내므로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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