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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0일 월요일 오후 8:4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시리즈 6 -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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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8~19)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시리즈 3 - 사랑은 오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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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5일 일요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우리가 '오래 참는다'라고 하면 많은 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래 참는 것은 결코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상대를 위해 오래 참는 것도 즐겁고,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동안 느낀 그리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생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 줍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천 년을 하루 같이 여기시며 경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랑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변치 않으며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참된 사랑입니다. 반대로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며 변질하는 사랑이지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는 영적인 사랑에 대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정의 몇 가지만 살펴보아도 자신에게 얼마큼 사랑이 있는지, 어느 정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측정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나가는 만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 하나님을 닮아가며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룬 정도를 1%에서 100%까지 나눈다면 우리가 100%가 돼야 온전한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영적인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해 10%쯤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상의 차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10% 이룬 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지만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의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인 것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이 있는가 하면,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 안에서의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적인 참음이란 무엇일까요? 가령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하지요. 어떤 사람은 감정을 억누르며 끙끙 앓기도 하고, 입을 꼭 다물어버리기도 하며, 괴로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오래 참으라고 했으니 힘들지만, 꾹 참아야지.' 하면서 의무적으로 참아내기도 하지요. 이러한 참음은 모두 악 속에서 참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계에 이르러 폭발해 버리기도 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반면 영적인 참음은 선으로 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모든 것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시니 참을 일 자체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육을 입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한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 경작의 역사도 오늘날까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오래 참음으로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6장 5~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셔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것을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긍휼함이 풍성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세의 완전한 자요,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시고 친히 인도하시며 그의 후손들을 통해 다시금 인간 경작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할지라도 다시 길을 여시며 선으로 변화되기까지 기다리셨으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길지라도 다시금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 보이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연단 하여 참 자녀를 얻으시기까지 영적인 오래 참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심 속에서 많은 열매, 곧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된 자녀들을 얻으실 수 있었으며 지금도 모든 사람을 그와 같이 기대하시며 바라보고 계십니다. 창세 이래 지금까지 이 땅에서 경작 받고 천국에 이른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했는지에 따라 영원한 천국의 처소와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4. 사도 바울을 통해 본 하나님의 오래 참음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옥에 가두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로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고백하며 동족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사랑에 가깝게 이르렀는지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사랑의 차원에 이를 뿐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 앞장서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오래 참으심으로 사도 바울을 기대하며 기다리셨을까요?
주님께 부름을 받기 전, 그는 매우 훌륭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지요.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율법적인 자기 의는 하나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많은 연단의 시간을 거치며 자기 의와 지식이 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하나님 뜻을 이뤄 가셨지요.
사도 바울은 권능 받아 큰일들을 이뤄가면서 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 했으며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하는 등 많은 핍박과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모든 연단을 인내로써 이겨냈지요. 그는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그 뜻에 기꺼이 순복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를 마음껏 다듬으실 수 있었지요. 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마지막까지도 온전히 죽어지는 것, 곧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백하며 기쁨으로 순종했지요.
이를 통해 사도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맞춰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많은 일을 했을지라도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고전 15:10). 오래 참으심의 결과로 얻어진 사도 바울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기쁘셨을 것입니다.


5.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해, 또한 사랑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오래 참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한 대로 소망 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앞서 4절 전반 절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는 무엇이 다를까요? 오래 참음은 내가 사랑을 베푸는 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한 오래 참음, 즉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의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모든 것을 참음에 있어서 모든 것을 믿어 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며,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기대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 신속히 모든 비진리와 악의 모양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픔도 있지만 이 모든 과정을 잘 견딤으로 영적인 사랑의 첫 관문인 오래 참음을 멋있게 통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으므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뤄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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